29살 때, 나는 부여에서 서울 영등포로 올라가 한 중견기업 부설 연구소에 입사했다.
서울에 묵을 집도 제대로 없어서 고시텔에서 생활하며 2년 반 동안 출퇴근을 했다.
지금 생각하면 중증뇌성마비 2급인 내가 비장애인들 틈에서 같은 방식으로 회사생활을 해보겠다고 버틴 것 자체가 참 무모한 일이었다.
물론 연구소라고 말은 그럴싸했지만, 실제로 내가 했던 일이 대단한 연구 업무였던 것도 아니었다.
그런류의 일들을 그만두고, 내 몸의 조건에 맞는 중증장애인 맞춤형 재택근무를 시작한 지도 어느덧 10년 정도가 되었다.
처음에는 그것이 어쩔 수 없는 선택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오히려 그 시간이 나에게는 내 삶의 방식을 다시 생각하게 만든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비장애인의 사회생활 방식을 억지로 따라가던 시기와, 내 조건에 맞는 방식으로 일상을 만들어온 시간이 나란히 쌓이면서 나는 많은 것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고 요즘은 이런 생각이 든다.
참 오래도 나에게 맞지 않는 기준 안에서 나를 평가하며 살아왔구나.
물론 모든 장애인이 다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장애를 가지고도 비장애인들과의 경쟁 속에서 아주 잘 해내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학교생활도 잘하고, 직장생활도 잘하고, 사회생활도 잘 해내는 장애인들이 있다.
그런 사람들의 노력과 능력은 분명 존중받아야 한다.
하지만 모든 장애인이 같은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장애의 정도도 다르고, 몸의 조건도 다르고, 타고난 성향도 다르고, 살아온 환경도 다르다.
누군가는 비장애인 사회의 속도에 맞춰갈 수 있지만, 누군가는 그 속도에 맞추려다가 계속 무너질 수도 있다.
나는 후자에 가까웠던 것 같다.
나는 선천성 뇌성마비를 가지고 살아왔다.
몸의 움직임은 남들보다 느리고, 어떤 동작은 어색하게 보일 수 있다.
말이나 반응도 일반적인 사람들과 다르게 보일 때가 있다.
그리고 사람들은 생각보다 자주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한다.
몸이 불편하면 생각도 느릴 것이라고 여긴다.
움직임이 어색하면 지능도 낮을 것이라고 오해한다.
반응이 빠르지 않으면 깊게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처럼 바라본다.
그런 시선 속에서 오래 살다 보면, 어느 순간 나도 나를 그렇게 보게 된다.
나 역시 한동안은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부족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어쩌면 지능도 낮은 편일지 모른다고 여겼다.
하지만 지금 돌아보면, 그 생각 자체가 잘못된 기준에서 나온 것이었다.
장애가 있는 사람이 비장애인의 조건을 그대로 따라가려고 하면, 나는 언제나 한참 모자란 사람처럼 보일 수밖에 없다.
비장애인처럼 빠르게 움직이지 못하고,
비장애인처럼 오래 버티지 못하고,
비장애인처럼 같은 방식으로 배우고 일하지 못한다면,
그 기준 안에서는 나는 계속 부족한 사람으로 평가된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부족하다는 뜻이 아니었다.
애초에 나에게 맞지 않는 기준으로 나를 재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비장애인의 실패한 버전이 아니다.
나는 다른 조건을 가진 사람이다.
그렇다면 내 삶의 방식도 달라야 했다.
나는 이제 비장애인의 능력을 똑같이 따라가지 못하는 나 자신을 인정하려 한다.
그 인정은 포기가 아니다.
비관도 아니다.
오히려 내 삶을 더 현실적으로 바라보기 위한 출발점이다.
나는 비장애인처럼 빠르게 움직이지 못할 수 있다.
비장애인처럼 오래 버티지 못할 수 있다.
비장애인처럼 같은 방식으로 배우고, 일하고, 사회생활을 하기 어려울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삶의 가능성까지 낮아지는 것은 아니다.
중요한 것은 내가 못하는 것만 바라보며 무너지는 것이 아니다.
내가 할 수 있는 다른 능력을 더 발전시키는 것이다.
몸의 속도가 느리다면 생각의 깊이를 키우면 된다.
움직임이 제한된다면 관찰력과 판단력을 키우면 된다.
출퇴근이 어렵다면 재택과 온라인 기반의 활동을 찾아야 한다.
말이나 표현이 서툴다면 글과 AI 도구를 활용해 내 생각을 정리하면 된다.
비장애인의 방식을 똑같이 따라가는 것만이 삶의 정답은 아니다.
내 조건을 인정하고, 그 조건 안에서 내가 가진 강점을 최대한 끌어내는 것.
나는 이것이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방향이라고 생각한다.
요즘 내가 가장 크게 느끼는 것도 이것이다.
내 삶에서 중요한 것은 단순히 돈을 버는 방법만이 아니다.
일을 하느냐, 안 하느냐만의 문제도 아니다.
남들처럼 사회생활을 하느냐, 못 하느냐만의 문제도 아니다.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나 자신을 컨트롤하는 능력이다.
장애를 가지고 살아가다 보면 자주 좌절하게 된다.
몸이 내 마음처럼 움직이지 않을 때가 있고, 남들보다 속도가 느리다는 사실을 계속 확인하게 된다.
사회는 빠르게 움직이고, 사람들은 빠른 반응과 빠른 결과를 요구한다.
그 속에서 나는 쉽게 무너질 수 있었다.
“나는 왜 이렇게 느릴까.”
“나는 왜 남들처럼 못할까.”
“어차피 해도 안 되는 것 아닐까.”
이런 생각이 반복되면, 장애 자체보다 더 무서운 것은 자기 자신을 포기하는 마음이 된다.
그래서 나는 이제 내 속도에 굴하지 않으려 한다.
남들과 비교하며 무너지지 않는 것.
내가 가진 한계만 바라보지 않는 것.
내 안에 남아 있는 강점을 찾아내는 것.
그리고 그 강점을 최대한 끌어내 발전시키는 것.
이것이 내 삶의 진짜 출발점이라고 본다.
삶은 단순히 혼자 밥을 먹고, 혼자 이동하고, 돈을 버는 것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내 삶의 방향을 남에게 완전히 맡기지 않는 것.
내가 가진 조건 안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계속 찾는 것.
나를 쉽게 포기하지 않는 것.
나는 이것이 더 중요한 삶의 능력이라고 생각한다.
몸의 속도는 느릴 수 있다.
하지만 사고의 깊이까지 느릴 필요는 없다.
움직임은 제한될 수 있다.
하지만 세상을 해석하는 방식까지 제한될 필요는 없다.
나는 이것을 너무 늦게 알게 된 것 같다.
내가 비장애인과 같은 속도로 살 수 없다고 해서, 내 삶의 가능성까지 낮아지는 것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남의 속도를 따라가는 것이 아니라, 내 속도를 잃지 않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속도 안에서 내가 가진 강점을 끝까지 키워내는 것이었다.
요즘은 예전보다 내 방식으로 살아갈 수 있는 도구들이 많아졌다.
혼자서도 글을 쓸 수 있다.
혼자서도 블로그를 운영할 수 있다.
혼자서도 영상을 만들 수 있다.
혼자서도 AI의 도움을 받아 생각을 정리하고, 자료를 찾고, 콘텐츠를 만들 수 있다.
예전에는 몸이 빠르게 움직이지 못하면 사회활동의 기회 자체가 제한되었다.
하지만 이제는 몸의 속도보다 생각의 방향, 경험의 깊이, 콘텐츠를 만드는 능력이 더 중요해지는 시대가 오고 있다.
나는 이 변화가 장애인의 삶에서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라고 본다.
여기에 주식과 투자도 포함될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주식은 위험하다.
아무 준비 없이 뛰어들면 오히려 삶을 더 불안하게 만들 수 있다.
장애인이든 비장애인이든, 주식을 쉽게 돈 버는 수단으로 보면 안 된다.
하지만 주식을 단순한 투기가 아니라 세상을 공부하는 도구로 보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주식은 기업을 보게 만든다.
산업을 보게 만든다.
정책을 보게 만든다.
기술의 방향과 돈의 흐름을 보게 만든다.
반도체가 왜 중요한지, 방산이 왜 커지는지, 에너지 산업이 왜 다시 주목받는지, AI와 로봇이 왜 미래 산업으로 연결되는지 주식을 공부하다 보면 자연스럽게 세상의 구조를 보게 된다.
나에게 주식은 단순히 돈을 벌기 위한 수단만은 아니다.
세상과 연결되는 방식이다.
산업을 읽는 훈련이다.
내 판단력을 키우는 과정이다.
내 작은 자본을 지키고 키우기 위한 현실적인 공부다.
몸으로 할 수 있는 일이 제한될 수는 있다.
하지만 생각으로 할 수 있는 일까지 제한되는 것은 아니다.
기업을 분석하고, 산업의 방향을 읽고, 경제 흐름을 이해하고, 내 자본을 어떻게 지킬 것인지 고민하는 과정은 내 삶을 조금 더 능동적으로 만드는 일이다.
나는 오래된 장애로 인해 생긴 여러 몸의 문제로 병원을 찾을 때가 있다.
그럴 때 자주 듣는 말이 있다.
“장애로 인해 생긴 문제라 어쩔 수 없습니다.”
“완전히 낫게 하기는 어렵습니다.”
“진행을 늦추는 방향으로 가야 합니다.”
“통증을 줄이는 약을 처방해드리겠습니다.”
솔직히 그런 말을 들으면 어느 정도는 이해가 된다.
나도 이미 알고 있다.
내 몸에는 태어날 때부터 가지고 온 한계가 있고, 그로 인해 시간이 지나며 생기는 문제들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 말에서 멈추고 싶지 않았다.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다는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나는 왜 이런 통증이 생기는지 알고 싶었다.
어떤 근육이 약해졌는지, 어떤 신경이 영향을 받는지, 어떤 자세와 움직임이 문제를 키우는지 알고 싶었다.
병원에서 처방받은 약이 통증을 줄여주는 역할을 한다면, 나는 그 통증이 왜 반복되는지도 알고 싶었다.
의사가 말하는 “어쩔 수 없음”이 내 삶 전체의 포기를 뜻한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안에도 내가 조절할 수 있는 작은 변수들이 남아 있을 수 있다.
운동을 조심하는 것, 자세를 바꾸는 것, 악화되는 동작을 피하는 것, 약해진 부위를 이해하는 것, 생활 속에서 무리를 줄이는 것.
이런 작은 선택들이 병을 완전히 없애지는 못해도, 내 삶의 질을 조금은 바꿀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나는 계속 묻는다.
왜 그런가.
무엇이 연결되어 있는가.
어디까지는 어쩔 수 없고, 어디부터는 내가 바꿀 수 있는가.
이 질문을 놓지 않는 태도 역시 내 삶의 방식이다.
나는 단순히 답을 기다리는 사람이 아니라, 주어진 한계 안에서도 해답의 조각을 찾으려는 사람이다.
이제 나는 내 삶의 방향이 달라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억지로 비장애인의 틀에 나를 맞추는 삶이 아니라, 내 조건에 맞는 방식으로 세상과 연결되는 삶.
출퇴근만이 삶의 증명은 아니고,
회사에 들어가는 것만이 능력의 증명은 아니며,
몸으로 빠르게 움직이는 것만이 잘 사는 삶의 기준은 아니다.
누군가는 글로 자신의 삶을 만들어갈 수 있다.
누군가는 영상으로 세상과 연결될 수 있다.
누군가는 주식과 경제 공부를 통해 자본을 지키고 키우는 방식으로 현실을 바꿀 수 있다.
누군가는 AI라는 도구를 활용해 자신의 생각을 사회적 결과물로 바꿀 수 있다.
그리고 그 모든 방식의 바탕에는 자기 자신을 포기하지 않는 힘이 있어야 한다.
장애인에게 필요한 것은 동정만이 아니다.
무조건적인 보호만도 아니다.
필요한 것은 자신의 조건에 맞는 방식으로 능력을 꺼낼 수 있는 환경이다.
몸이 불편한 사람에게 비장애인의 속도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이 가진 사고력, 경험, 관찰력, 콘텐츠 생산 능력, 판단력, 지속력을 어떻게 살릴 수 있을지 고민해야 한다.
나는 이제 나를 비장애인의 기준으로만 평가하지 않으려 한다.
나는 남들과 같은 방식으로 빠르게 달리는 사람은 아닐 수 있다.
하지만 나는 내가 보는 방식으로 세상을 해석할 수 있다.
나는 비장애인의 속도를 쫓아가다 지치는 삶이 아니라, 내 속도 안에서 내 강점을 키우는 삶을 선택하고 싶다.
그것이 내가 요즘 느끼는 가장 큰 변화다.
내가 너무 오래 시간 낭비를 했다는 생각이 드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나는 오랫동안 나에게 맞지 않는 기준 안에서 나를 평가했다.
그리고 그 기준 안에서 부족한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다르게 살아보려 한다.
내 조건을 인정하고,
내 속도를 인정하고,
내 강점을 키우고,
내 방식으로 일상을 만들어가는 삶.
나는 그것이 앞으로 내가 가야 할 길이라고 생각한다.
장애인은 비장애인의 기준에 억지로 맞춰지는 존재가 아니다.
장애인은 자기 조건에 맞는 방식으로 삶을 설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이제는 그런 삶이 가능한 시대가 조금씩 열리고 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