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장애인으로 살아야 할 운명이라면, 갖춰지면 좋은것들..

장애인의 날을 지나면서 SNS에 올라온 이런저런 글들을 보게 됐다. 그러다 문득 생각해봤다. 내가 중증장애인으로 대략 50년 가까이 살아오면서, 어떠한 능력이 나의 삶을 지탱하는데 도움이 되었는지. 거창한 정답을 말하려는 건 아니다. 그냥 내가 살아오면서 느낀 현실적인 생각이다.

첫째, 심리적 건강

가장 먼저 필요한 건 심리적 건강이다. 여기서 말하는 심리적 건강은 단순히 밝고 긍정적인 마음을 뜻하는 게 아니다. 내가 말하는 건 심리적인 공포나 불안 때문에, 할 수 있는 일까지 못 하게 되지 않는 상태를 말한다. 장애가 있으면 신체적 제약은 분명히 있다. 하지만 살아보면 어떤 경우에는 몸의 한계보다 마음의 공포가 더 큰 장벽이 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자동차 운전도 그렇다. 지체장애가 심해서 물리적으로 운전을 못 하는 경우도 있지만, 실제로는 운전 자체에 대한 공포나 불안 때문에 시도조차 못 하는 경우도 많다. 아내나 주변 지인들을 보면서도 그런 사례를 꽤 접했다. 물리적 제약으로 할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할 수 있는데도 두려움 때문에 포기하게 되면, 삶의 선택지는 더 좁아진다. 장애로 인해 이미 선택지가 줄어든 상황이라면, 심리적 공포 때문에 그 선택지를 더 줄이지 않는 것. 그게 내가 말하는 심리적 건강에 가깝다.

둘째, 어느 정도 이상의 지능

조심스러운 말이지만, 지능은 장애인의 삶에서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장애가 있으면 삶의 난이도가 올라간다. 비 장애인들이 별 생각 없이 지나가는 일도, 장애인은 계속 계산해야 할 때가 많다. 어디를 갈 수 있는지,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어떤 도움을 받아야 하는지, 물리적인 제약이 있는 내가 처리할 수 있는 일인지, 어떤 선택이 나에게 유리한지 계속 판단해야 한다. 그때 어느 정도의 이해력과 판단력은 삶의 무기가 된다. 지능은 남을 이기기 위한 것이 아니다. 자기 삶을 덜 손해 보게 만들기 위한 도구에 가깝다.

셋째, 현실을 받아들이는 능력

장애를 받아들이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수용은 체념과 다르다. 체념은 “어차피 안 돼”에서 멈추는 것이고, 수용은 “이 조건에서 가능한 건 뭐지?”라고 묻는 것이다. 내가 할 수 없는 일을 인정하는 건 아프다. 하지만 그걸 인정하지 않으면, 오히려 내가 할 수 있는 일도 제대로 선택하지 못한다. 못 하는 것을 부정하지 않고, 할 수 있는 것을 찾아 키우는 능력. 이게 장애인으로 살아가면서 정말 중요하다고 느꼈다.

넷째, 구조적 사고와 입체적 사고

장애가 있는 삶에서는 단순하게 판단할 수 없는 일이 많다. 겉으로 보면 별일 아닌 것처럼 보여도, 그 안에는 여러 조건이 얽혀 있는 경우가 많다. 예를 들어 나는 전기차를 운행하면서 아파트 단지 안에서 충전을 하려면, 충전 구역이 있는 곳까지 차를 가져다 놓아야 한다. 그 위치가 정문 옆 경비실 근처라면, 어쩔 수 없이 집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주차하게 된다. 그런데 누군가는 그걸 보고 아무 생각 없이 말할 수 있다. “왜 이렇게 멀리 주차해놨어요?” 그 사람 눈에는 그냥 멀리 주차한 것만 보인다. 하지만 내 입장에서는 전기차, 충전 위치, 이동 거리, 몸 상태 같은 조건을 모두 고려한 선택이다. 이런 차이가 결국 구조적 사고와 입체적 사고의 차이라고 생각한다. 구조적 사고는 문제를 하나로 뭉뚱그리지 않고 나누어 보는 능력이고, 입체적 사고는 여러 조건을 함께 놓고 판단하는 능력이다. 장애가 있는 삶에서는 고려해야 할 조건이 많다. 이걸 나누고 연결해서 볼 수 있어야, 몸도 불편한데 굳이 거치지 않아도 될 불필요한 과정을 줄일 수 있다.

다섯째, 도움을 요청할 줄 아는 능력

오래 살아보면 알게 된다. 혼자 다 하려는 것이 항상 강한 건 아니다. 때로는 미련한 것일 수도 있다. 장애가 있는 사람에게 필요한 건 독립심만이 아니다. 필요할 때 도움을 요청할 줄 아는 능력도 필요하다. 물론 도움을 요청하는 건 쉽지 않다. 거절당할 수도 있고, 자존심이 상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람은 원래 혼자 사는 존재가 아니다. 도움을 받을 수 있는 것도 삶의 중요한 기술이다.

여섯째, 기술과 도구를 활용하는 능력

요즘 시대에는 기술이 큰 힘이 된다. 컴퓨터, 스마트폰, 인터넷, AI, 보조기기. 이런 도구들은 장애인의 삶을 넓혀준다. 예전에는 몸으로 직접 해야 했던 많은 일들을 이제는 도구로 대신할 수 있다.

글쓰기, 투자, 정보 검색, 블로그 운영, 콘텐츠 제작. 몸의 제약이 있어도 할 수 있는 일이 많아졌다.

기술은 단순한 편의가 아니다. 어떤 사람에게는 삶의 반경을 넓혀주는 또 하나의 몸이다.

일곱째, 작은 성취를 만드는 능력

큰 성공만 바라보면 쉽게 지친다. 장애가 있는 삶에서는 특히 작은 성취가 중요하다. 오늘 글 하나를 썼다. 오늘 공부를 조금 했다. 오늘 투자 기록을 남겼다. 오늘 어제보다 조금 나았다. 이런 작은 성취들이 쌓이면 사람이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사람은 거창한 희망만으로 사는 게 아니다. 작은 증거들로 버틴다. “나는 아직 할 수 있다”는 증거. 그게 계속 필요하다.

여덟째, 유머와 거리두기

삶이 늘 진지하기만 하면 버티기 어렵다. 가끔은 자기 상황을 조금 떨어져서 볼 수 있어야 한다. 웃을 수 있는 여유도 필요하다. 이건 고통을 가볍게 보자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고통이 크기 때문에 유머가 필요하다. 유머는 현실을 부정하는 게 아니라, 현실에 잡아먹히지 않기 위한 방법이다.

아홉째, 에너지와 속도를 조절하는 능력

장애가 있는 삶에서는 열심히 하는 것만큼이나, 에너지를 어떻게 쓰는지도 중요하다. 무리해서 한 번에 많은 것을 하려고 하면 금방 지치고, 그렇다고 너무 멈춰 있으면 삶이 정체된다. 그래서 자기 몸의 에너지와 속도를 아는 것이 필요하다. 하루에 얼마나 집중할 수 있는지, 언제 쉬어야 하는지, 어떤 일을 먼저 해야 하는지 스스로 파악해야 한다. 짧게 폭발하는 것보다 중요한 건, 느리더라도 끊기지 않고 계속 가는 것이다.

열째, 환경을 나에게 유리하게 만드는 능력

사람은 의지만으로 살아가는 게 아니다.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는다. 특히 장애가 있는 삶에서는 나를 억지로 환경에 맞추는 것보다, 가능한 범위 안에서 환경을 나에게 유리하게 바꾸는 능력이 중요하다. 자주 쓰는 물건을 가까이에 두고, 동선을 줄이고, 방해 요소를 줄이고, 작업하기 쉬운 구조를 만드는 것. 이런 작은 환경 설계가 삶의 피로를 크게 줄여준다. 몸이 불편한 사람에게 환경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다. 환경이 편하면 할 수 있는 일이 늘어나고, 환경이 불리하면 할 수 있는 일도 줄어든다. 그래서 장애가 있는 삶에서는 내 의지만 키우는 것보다, 내가 움직이기 쉬운 구조를 만드는 일이 훨씬 중요할 때가 많다.

열한째, 자기 기준과 선택과 집중

장애가 있는 삶에서는 남의 기준을 그대로 따라가면 쉽게 흔들린다. 남들이 하는 방식, 남들이 가는 속도, 남들이 정한 성공 기준을 그대로 가져오면 비교와 좌절이 커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중요한 건 내 조건에서의 나만의 기준이다. 어제보다 조금 나아졌는지, 내가 통제할 수 있는 부분에 집중했는지, 내 삶에 실제로 도움이 되는 방향으로 가고 있는지. 그리고 모든 것을 다 잘하려고 하기보다, 내가 키울 수 있는 몇 가지에 집중하는 것도 중요하다. 조건이 제한되어 있을수록 버릴 것은 버리고, 키울 것은 키워야 한다. 그게 삶을 오래 끌고 가는 데 필요하다.

열두째, 복지제도 이용과 정보 습득 능력

장애가 있는 삶에서는 정보를 아는 것과 모르는 것의 차이가 생각보다 크다. 복지제도, 지원금, 보조기기, 이동 지원, 의료 지원, 세금 감면, 각종 신청 절차 같은 것들은 누가 알아서 챙겨주지 않는 경우가 많다. 내가 찾아보고, 물어보고, 신청해야 받을 수 있는 것들이 많다. 그래서 정보력도 중요한 능력이다. 좋은 제도가 있어도 모르면 없는 것과 다르지 않다. 반대로 작은 정보 하나가 생활의 불편을 크게 줄여주기도 한다. 장애가 있는 삶에서는 몸으로 버티는 것만큼이나, 제도를 알고 활용하는 능력도 중요하다.

마무리

중증 장애인으로 살면서 느낀 건, 장애가 있는 삶에 필요한 건 단순한 의지만이 아니라는 점이다. 심리적 건강, 지능, 현실 수용 능력, 구조적 사고와 입체적 사고, 도움을 요청하는 능력, 기술 활용 능력, 작은 성취, 유머, 에너지 조절, 환경 설계, 자기 기준과 선택, 집중. 이런 것들이 하나씩 삶을 받쳐준다. 장애는 선택할 수 없는 조건일 수 있다. 하지만 그 조건 안에서 어떤 능력을 갖추고 살아갈지는 어느 정도 선택할 수 있다. 나는 지금도 내 조건에서 가능한 일을 선택하고, 의미를 두고, 키워보려 한다. 거창하게 극복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그냥 이 조건에서 삶을 조금 더 제대로 굴려보려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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